집착에 가까운 질투심으로 고통받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 Jean Louis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출처: wikipedia>
세상은 잘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 주변에 ‘엄친아’들은 왜 이리 많은가. 엄마 친구 아들들은 하나같이 ‘훈남’인데다가 공부까지 잘한다. 이들과 비교될 때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TV나 신문을 볼 때는 더 하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이들이 어디 하나 둘이던가. 그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너는 왜 이렇게 못하냐며 손가락질 받는 느낌이 밀려든다.
“질투만큼 행복을 해치는 감정은 없다.” 철학자 데카르트 (R. Descartes)의 말이다. 물론, 나도 남들만큼 잘나고 싶다. 하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내 마음은 늘 지옥이다. 남의 잘남이 곧 나의 못남으로 다가오는 탓이다. 남보다 뛰어나기 어려울 때, 우리는 흔히 질투에 빠져들곤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는 질투의 뜻을 이렇게 정한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건강하지 못한 기쁨, 그리고 상대가 유리한 조건을 빼앗기는 것을 보고 싶은 바람”
언론은 잘나가는 이들의 잘못과 추락을 크게 보도하곤 한다. 이런 기사에는 비난의 댓글이 그득하게 달리기 마련이다. 리포베츠키는 이런 모습 속에서 사람들의 숨은 욕망을 들추어댄다. “유명인사의 불행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미디어가 정의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중의 질투심에 휘둘리는 탓도 크다.”
남의 잘남은 나의 못남이다. 반면, 남들의 못남은 내게는 위안이다. 그래서 질투하는 마음, 앞서가는 이들을 끌어내리고픈 검은 욕망은 끝없이 피어난다. 하지만 미움으로 가득한 영혼이 행복할 리 없다. 질투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는 없을까?
옛 사람들은 질투심을 매우 두려워했다. 리포베츠키에 따르면, 질투는 어느 문화에서나 가장 멀리해야 할 악덕(惡德)이었다. 흥미롭게도, 예전에는 질투를 하는 이들보다 질투를 일으키는 쪽을 더 비난하고 했단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자식 자랑은 하는 게 아니었다. 아들딸이 좋은 학교에 가도, 멋진 배우자를 만나도 여럿이 모인 곳에서는 기쁨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돈을 많이 벌어도, 승진을 해도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 듯, 아닌 듯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잘난 나와 비교될 다른 이들의 심정은 어떨지 생각해보라. 주변의 속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자랑하고픈 마음이 쏙 들어갈 테다. 리포베츠키에 따르면, 전통사회에서는 세상의 행복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고 믿었단다. 내가 많이 차지하면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몫은 줄어든다. 내가 많은 행복을 누린다면 남들은 그만큼 불행해지게 될 것이다. 시기와 질투는 갈등을 부른다. 그러니 나의 잘남을 되도록 숨기고 감추는 것이 좋다.
하지만 리포베츠키는 이런 모습을 마뜩지 않게 여긴다. 그에 따르면, 전통사회에서는 결국 ‘공평하지만 결국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다.’ 이웃과 친척의 눈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행복했을까? 질투를 막기 위해 성장까지 멈추라는 눈흘림은 ‘뒷다리 잡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예 어떤 광고들은 질투심에 대놓고 호소하기까지 한다. 이 상품을 손에 넣으면, 주변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리라는 식이다. <출처: gettyimages>
현대사회에서 질투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띄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잘남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질투 또한 더 이상 일으키지도, 느끼지도 말아야 할 악덕이 아니다. 질투는 되레 성장과 발전을 이끄는 힘처럼 여겨진다.
광고만 해도 그렇다. “바캉스는 환상적이고, 우리 자녀들이 가장 예쁘며, 나의 직업은 흥미진진하다.” 광고 속에 비치는 성공한 이들의 모습이다. 아예 어떤 광고들은 질투심에 대놓고 호소하기까지 한다. 이 상품을 손에 넣으면, 주변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리라는 식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잘난 점이 남들의 질투를 부르지는 않을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남들보다 못나 보이지 않을지를 더 걱정한다. 민주주의는 세상이 평등하고 말한다. 게다가 누구나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다고 힘주어 외친다. 똑같은 기회를 주었는데도, 왜 그대‘만’ 꿈을 이루지 못했는가? 질투심이 든다면 더 노력해야 할 일이다. 질투로 괴로운가? 이는 전적으로 그대 탓이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성공을 거머쥐도록 하라!
어찌 상처 주는 세상에 공격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말을 들을 때 억장이 무너질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못난 것이라고? 출발점이 같다고? 이 말에 고개 끄덕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 현실만 해도 그렇다.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이들과 세상에 나기 전부터 빚을 이고 난 아이의 처지가 같던가? 리포베츠키도 이 점을 꼭 짚어 지적한다.
“청소년들은 또래 친구가 가지고 있지만 자신은 갖기 어려운 명품을 보며 속상해 한다. (프랑스) 빈민가에서는 파괴 행위가 빈번하고, 청소년들은 자신이 가난해서 다른 이들과 많이 다르며 소비세계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에 ‘원한’을 품고 더욱 ‘분노’한다. 이러한 감점은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는 이 시기에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 질 리포베츠키, 정미애 옮김, [행복의 역설], 알마, 2009 p. 367
출구 없는 불행은 고스란히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리포베츠키는 계속해서 말한다. “삶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데 어떻게 다른 이들의 행복에 ‘공격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다른 이들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의 불행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소비가 자리를 잡는 단계에서 소비는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출처: gettyimages>
그렇다면 우리가 질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리포베츠키는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되레 희망을 찾는다. 리포베츠키는 ‘소비’의 발전을 세 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는 대량생산이 시작되는 단계다. 이때는 ‘소비 능력이 곧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 예전에는 냉장고나 자동차 등을 아무나 사기 어려웠다. 이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우월함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했다.
두 번째는 ‘과시적 소비’가 뿌리내리는 단계다. 상품이 시장에 차고 넘치는 상황, ‘유행’은 남는 물자를 팔아 치우는 역할을 한다. 아직 쓸 만 해도 사람들은 유행을 좇아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곤 한다. 최신 상품을, 그것도 꼭 필요하지 않은 사치스러운 물품을 누린다는 사실로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곤 했다.
세 번째 단계는 ‘과소비 사회’가 자리를 잡는 단계다. 시장에는 이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만 있지 않다. 상품은 무척 다양해졌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부만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는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예컨대, 환경에 관심 있는 이들은 ‘바이오 인증’이 붙은 상품을 산다. 공평한 무역에 힘을 쏟는 이들은 ‘공정무역’ 딱지가 붙은 제품에 마음이 끌릴 테다. 억압과 규제를 싫어하는 이들은 자유로운 히피식 복장을 갖추는 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꼭 비싼 물건이 아니어도, 세상에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온갖 제품들로 차고 넘친다. 리포베츠키는 과소비사회가 ‘민주적 인간(homo democraticus)’을 만든다고 말한다. 누구와 자신을 견주며 우월함이나 열등감을 느끼기보다, 남들과 다른 나를 드러내고 인정받는 데 더 신경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한류(韓流)의 세계화를 외칠 때, 한국의 가요가 성공하려면 세계적인 유행에 맞추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정작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싸이의 음악은 한국의 B급 문화 코드에 충실하다.<출처: Eva Rinaldi at en.wikipedia.org>
리포베츠키의 틀로 다시 질투를 바라보자. 나는 왜 ‘엄친아’들을 질투할까? 이는 엄친아의 틀로 나 자신을 가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모범생은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삶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 자신만의 잣대로 나를 바라보라. 내가 엄친아 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물론, 우리 현실에서 이런 마음자세를 갖추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어릴 때부터 한 줄 세우기식 경쟁 문화에 푹 젖어있는 탓이다. 가수 싸이(Psy)의 음악은 ‘B급 문화’를 제대로 보여준다. “나 완전히 새됐어”라는 가사로 유명한 ‘새’에서부터 ‘젠틀맨’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류(韓流)의 세계화를 외칠 때, 한국의 가요가 성공하려면 세계적인 유행에 맞추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정작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싸이의 음악은 한국의 B급 문화 코드에 충실하다. B급 문화가 주류 문화보다 ‘못한 것’이라고 여겼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성공이다. 나의 현실이 세상의 잘난 이들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여길 때, 나아가 이 다른 점을 최대한 훌륭하게 끌어낼 수 있을 때, 내 마음을 쥐고 흔드는 질투심은 눈 녹듯 사라질 테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에게는 엄친아와 다르다고 내세울 무엇이 있을까? 세상은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다. 내가 최고가 될 수 있는 잣대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