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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의미와 태극기 계양법
글쓴이 관리자 조회수 2321
작성일 2012-02-24 00:00:00


 숨가쁘게 지나간 2월달을 뒤로하고, 3월이 다가옵니다.
바쁜 일상 생활하다보면, 국경일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마냥 반갑게 느껴지는 "쉬는 날"입니다.

 2010년 2월 28일, 한국 교원단체총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초중고생의 40.9%가 삼일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냥 "무관심"과 "쉬는 날"로 치부해버리기엔 삼일절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의 뼈아픈 고통이 느껴지는 날입니다.

 우리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 항거함과 동시에 전 세계에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1919년 3월 1일. 이렇게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않고 독립을 외치며 희생하셨기때문이니까요.

그럼 울산누리와 함께 삼일절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태극기 계양법에 대해 알아볼까요?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난 운동인데요.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합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하고 투옥시키며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며 인권을 유린하기도 하였습니다. 

 1910년대에 지속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인하여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는데요. 그에 따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하였습니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요.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한 무장조직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운동입니다. 각지에서 비밀결사가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물론, 많은 조직들이 일제에 발각되어 파괴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당시 각지에서 나타난 비밀결사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실력양성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입니다.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서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셋째는,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당시 일제의 경제적 약탈로 인하여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민족적 차별대우,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게 됩니다.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입니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신 많은 순국선열들이 계시지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하면, 유관순 열사가 아닐까요?

                                                                         

<유관순열사 수형자 기록표>
이미지 출처: 천안시 유관순열사 기념관

 유관순 열사의 부친은 계몽운동가이제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였습니다. 그리하여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는데요. 유관순 열사 또한 이런 부친의 영향으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고 합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됩니다.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 후, 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다 당시 입었던 상처가 도져 결국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옥중에서도 독립의 의지는 끊기지 않았던, 유관순 열사.
옥중 생활 1년 반의 세월이 흘렀고, 그 당시 유관순 열사의 나이. 19세의 꽃다운 청춘이었습니다.

 




출처 :
http://blog.ulsan.go.kr/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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